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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유학자 율곡이이 그리고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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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 이이


이이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호는 율곡이다. 일찍이 학문으로 이름을 떨쳐 천재로 불렸다. 조선의 가장 유명한 학자로는 이이와 이황을 꼽는다. 이이는 어려서 과거에 급제해 이름이 알려졌다. 과거에 무려 9번이나 급제해 구도장원공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본가는 파주였지만 아버지 이언수가 강릉의 신사임당과 결혼해 강릉에서 1536년 태어났다. 서인의 대표격이었는데 초기에는 당쟁에 참가했지만 후에는 그 폐단을 깨닫고 동인과 서인의 싸움을 막는 데 힘썼다.


이이는 세금을 개혁하기 위해 대공수미법(공물을 쌀로 통일하자는 내용)을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병조 판서가 되어서는 여진족의 침입을 막았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국방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10만 군대를 길러야 한다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학문이 깊었는데 시도 잘 짓고 그림도 잘 그렸다. 자식을 잘 가르치고 부모에게 효도하여 조선 시대 최고의 여성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이는 이황을 존경했다. 1558년(명종 13) 스물세 살 때 이이는 쉰여덟 살인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 동안 머물며 이황과 학문 토론을 했는데, 이황은 이이의 재능에 크게 감탄했다. 비록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토론을 계속했다.



1583년(선조 16) 병조 판서에 임명되고,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병역을 지게 해 병력을 늘릴 것을 주장했으나 양반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이는 일본이 장차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10만 명의 군대를 양성할 것을 주장했으나, 평화로운 시대에 전쟁을 말한다는 공격을 받고 결국 관직에서 물러났다.


1584년(선조 19) 이이는 마흔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성학집요》 《격몽요결》 《동호문답》 등이 있다.


이황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퇴계 이황


율곡과 함께 성리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이황은 1502년 좌찬성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죽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527년(중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했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등용된 뒤 충청도 어사 등을 지내고 1543년 성균관 사성이 되었다. 그 뒤로는 관직 생활을 하다가 물러나 낙향하고 재등용되고 다시 사퇴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560년 도산 서당을 짓고 7년 동안 독서 · 수양 ·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길렀다. 1570년 병이 깊어져 칠십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황의 학문은 일본에도 전해져 많은 영향을 주었고 중국에서도 성인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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