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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세상

아관파천 현장 '러시아 공사관' 복원 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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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년전 '아관파천'의 현장인 서울 정동 옛 러시아 공사관을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됐다.


 서울 중구(구청장 최창식)는 '정동야행' 행사를 하루 앞둔 10일 옛 러시아 공사관 내 탑 내부를 언론에 공개하며 복원 작업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구는 자료조사와 고증·기본설계 등 종합계획을 마련하고 발굴작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 과정 전반에 관한 용역을 수행할 업체 선정 절차가 현재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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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남아있는 러시아 공사관 건물은 16m 높이의 탑뿐이다. 공사관 건물은 1890년 건립됐다. 벽돌로 된 2층 건물에 입구에는 개선문 모양의 아치문이 있었다. 6·25전쟁 때 탑을 제외한 나머지 구조물이 파괴됐다.


 러시아 공사관이 원형을 되찾으면 아관파천의 현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정동을 찾은 시민은 공사관 안팎을 둘러보며 아관파천 당시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다.


아관파천은 구한말 국운이 쇠하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이듬해인 1896년 2월11일 신변 위험 등 이유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아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1897년 2월까지 약 1년간 이곳에 머물며 국정을 수행했다. 



 고종은 친위 기병대 설치,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 등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민영환을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특명전권공사에 임명해 영국·독일·러시아로 보내기도 했다.고종이 대한제국 선포(1897년 10월)에 앞서 환구와 사직 등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 장소도 바로 러시아 공사관이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때 엄 상궁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종의 승은을 입은 후 1885년 궁 밖으로 쫓겨났던 엄 상궁은 을미사변 후 고종의 부름을 받고 재입궁한다. 엄 상궁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을 보필하며 43세에 아들을 잉태했다. 엄 상궁은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 영친왕 이은(李銀)을 낳았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거처한 방은 공사관에서 가장 안락한 방으로 내부가 르네상스풍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사관은 광복 직후에는 소련 영사관으로 활용됐다.


 러시아 공사관은 원형이 대부분 손상됐음에도 역사적 의의를 감안해 1977년 9월 사적 제253호로 지정됐다.


 1981년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공동 발굴로 탑의 동북쪽에서 밀실과 비밀통로가 확인됐다. 이것이 경운궁까지 연결됐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러시아 공사관을 설계자한 인물은 러시아인 사바틴(1860~1921)이다. 그는 조선 외교고문으로 활동 중이던 묄렌도르프의 권유로 1883년 입국했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전까지 20여년간 우리나라에 머물렀다. 



 사바틴은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것을 목격한 유일한 외국인이다. 을미사변 직후 사바틴의 증언은 영어와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돼 본국에 전달됐다. 


 사바틴은 러시아 공사관 뿐만 아니라 인천해관청사(1883), 세창양행 사택(1884), 관문각(1888, 외국 외교관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활용된 경복궁 내 서양식 건물) 등 여러 건축물을 설계했다. 재미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요청으로 독립문(1896)을 설계했다. 덕수궁 안 정관헌, 중명전, 석조전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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